구로사와 아키라 5 - 숨은 요새의 세 악인//요짐보//츠바키 산주로

나는 이제까지 그를 30번 만날 수 있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1910년에 태어나 1998년에 사망했다.

이제 바야흐로 강렬한 마초 인상의 사내, 미후네 토시로의 시대이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초-중기 페르소나 2인 중 시무라 다케시(1905~1982 향년 83세)가

평범한 노인의 인상으로 "이키루-살다"에서 시한부 인생의 공무원의 그네타기와

"7인의 사무라이"에서 노련한 전쟁 군인 전술가의 대머리 만지기로 관객에게 각인되었다면

 

 

미후네 토시로(1920~1997 향년 77세)는 "주정뱅이 천사"에서의 날렵한 턱선을 자랑하던 20대 미남에서

"들개"의 제대군인 출신의 진지한 신참형사, "조용한 결투"의 인내를 미덕으로 여기는 젊은 의사

"라쇼몽"의 마초적인 산도둑의 강간과 살인의 회상을 지나서  

"7인의 사무라이"에 와서야 기필코 자신의 광기를 마음껏 개드립치면서 영화 내부를 장악한다.

이후, 시무라 다케시가 오십대가 넘어서자 30대 중반의 미후네 토시로는 실질적인 1인 페르소나의 위치로 들어선다.

 

 

이 시기 미후네 토시로는 씰룩거리는 눈썹과 팔자 수염을 위주로 한 마초성으로 포장된 사무라이 남성미를 강조하여 

"거미집의 성"의 성주를 살해하고 욕망의 종점인 내적 공포에 시달리다 부하에게 시해되는 장군,

"밑바닥"의 빈민굴 유일의 도둑으로 주인집을 공격하고 여인을 사랑하는 넉넉한 사내,

"숨은 요새의 세 악인"에서 패망한 봉건 공주를 곁에서 묵묵히 지키는 장군을 거쳐

그의 연기만으로 하나의 장르를 이루었다고 할 "요짐보"에서는 공히 구로사와 아키라의 현신을 이룬다.

40대 중년이 된 이후 그의 거대한 기둥같은 웅지의 모습은 "천국과 지옥"의 부도 위기에 몰린 사장에서 잘 드러난다.

 

 

초기의 시무라 다케시에서 중기의 미후네 토시로로, 

구로사와 아키라의 최초의 컬러 영화 "도데스 까덴" 이후의 후기 영화들에서 나카다이 타츠야 등으로의 이동은

단순히 배우의 노화에 따른 교체라는 측면도 작용했겠지만,

초-중기의 경우, 작품의 제작 당시 사회 상황에 비추어 구로사와 아키라라 선택한 자신의 모습을 극 중에 투영할

훈고적 서민 스승의 모습 즉 페르소나로서 적합한 남성 이미지의 변화로도 읽을 수 있겠다.

이는 전술했다시피 오즈 야스지로의 늙어가는 아버지, 미조구치 겐지의 수난받는 여성의 모습보다는 적극적으로

당대의 현실에 대해 리얼리즘적 사회드라마 소품 등을 띄엄띄엄 연출한

감독 자신의 일본에 대한 심려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일본이 제 2차 제국주의 전쟁에서 미국에서 패망한 이후 50년대 중반까지

시무라 다케시라는 페르소나는 평범한 중년의 얼굴을 가진 삶의 깊이를 아는 달관된 구수함으로 다가왔다면

미후네 토시로는 구로사와 아키라가 본격적으로 대하 사극과 엔터테인먼트적 연출 등을 스크린 위로 올려놓았을

50년대 중반 이후에 펄떡펄떡 뛰는 극악스러운 마초 이미지를 날 것 그대로 들고 60년대 중반까지

다름 아닌 정의로운 사무라이 이미지의 중세 시기로의 퇴행을 미덕처럼 복원하기를 바라는 중간 훈련자로 활약했다.

 

 

잘 알려진대로 구로사와 아키라가 일본 국내 굴지의 제작사들로부터 버림받고

외국에서 제작비를 끌어다 대작 영화들을 제작할 무렵에는 이미 중년이 넘어버린 나카다이 타츠야 정도만

두어차례 작품 속에서 눈에 띄일뿐인데, 이 시기 감독은 여전히 욕망의 허실을 탐미하는 듯 했지만,

철저히 허무주의 안에서 자신의 영화 말년을 한탄하여서인지 마땅한 페르소나를 발굴하지 않았다.

거꾸로 말하자면, 그는 이미 자신을 영화속에서 투영했던 시기의 투지를 상실하지 않았나싶다.

  여튼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의 미후네 토시로라는 배우는 무시못할 강인함으로 영화사에 자리매김한다.

 

시무라 다케시가 "카케무샤"에서 그의 말년의 연기 인생을 보냈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연출작 외에 "고지라" 시리즈의 몇 편에 출연한 것을 제외하고는 눈여겨볼만한 작품이 없는 것처럼

"7인의 사무라이" 이후 출연한 사무라이 시리즈물 말고 구로사와 아키라를 벗어난 60년대 이후 말년까지의

미후네 토시로 또한 다국적 영화에서 서양 스타들의 조연으로 자리매김하는 등 눈여겨볼만한 작품이 많지 않지만,

거꾸로 그만큼 두 배우 모두 구로사와 아키라와 운명을 같이한 페르소나 본연의 운명을 누렸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시기 미후네 토시로를 내세운 구로사와 아키라의 웅장한 엔터테인먼트 영웅담들을 세 편 둘러보자.

   

13. 숨은 요새의 세 악인 隱し砦の三惡人(1958) : 남은 악인은 누구일까? 

 

황금을 둘러싼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진진하기 마련이지만,

대부분의 황금 탈취와 운반의 영화에서 결국 황금은 히치콕식 맥거핀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황금으로 표상되는 추악한 인간의 욕망에 비한다면 황금 자체는 차라리 숭고하기 때문이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할리우드에서 흔히 활용했던 "시에라 마드레의 황금"류의 허황된 타락류나

머니 환타지의 황홀함에 집착하는 현재까지 반복되는 악습을 떠나

황금 자체를 정치적 자금이라는 목적에만 사용되는 숭고한 물품으로 전환시킨다.

이런 유교적 봉건주의를 살짝 비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코믹한 농부 출신 방랑자들이다.

 

 

미후네 토시로가 맡은 강인하고 충직하며 발굴의 무술 실력을 가진 장군 역할이나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매서운 미모의 공주는

실상 극 내에서 두 명의 농부 출신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내들에 비해서 부차적이다.

극 내외부를 주도하는 인물은 공주와 장군임에도 영화의 시작과 끝은 농부 두 명에게 맞추어진다.

 

 

미후네 토시로가 "거미집의 성"에서 뛰쳐나와 본연의 장군으로 돌아갔다면

두 농부는 "밑바닥"에서 만났던 빈민굴 사람들이 자신들의 공동 주거지를 떠나온 결단을 내린 것처럼 보인다.

시무라 다케시는 "거미집의 성"에 이어 충신 역할이지만, 거의 단역에 머무른다.

 

기본적으로 황금을 운반하는 길이라는 로드 무비의 구성을 갖춘 영화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에피소드와 쫓아오는 적군이 주는 스릴러.

군데군데 덫처럼 설정해놓은 미끄러운 반전의 재미 등으로 오락물로서 임무에 충실하다.

 

 

황금을 감춘  장소가 나무가지 속이라는 재치는 후일 불장작 축제속에서

가차없이 장군이 황금 나무 장작을 불 속으로 처박을 때 하나의 환희와 교훈을 던진다.

하나의 장작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서민들의 군무와 노래 속에 장군과 공주마저도 자의로 포섭될 때

구로사와 아키라는 자신의 영화 속 친서민적 이미지를 다시금 반복한다.

전작이었던 "밑바닥"에서의 좁은 방안에서의 흥겨운 가무를 실외 군중으로 옮겨온 느낌이다.

 

 

전쟁에 패한 서민으로 내몰리는 여인을 구하는 공주와  끝까지 운좋게도 그들 곁에 머무르는 황금의 이미지에서

감독은 단순한 황금 운반 안으로 슬쩍 이미 경제적 재기에 성공한 일본 서민들에게 찬가를 바치고 있다.

하지만, 초반 두 농부에게 필요없는 구덩이를 파게하는 장군이나 

벙어리인 척 스스로 가장하여 자신의 패망에 대해 입을 열지 않는 공주,

끝까지 공주 대신 목숨까지도 버리려는 여인의 모습에서 왠지 무언가 지시하려는 윗선의 자세가 엿보일 때

구로사와 아키라가 가지는 좌우 모두에 대한 천박한 이데올로기가 아쉬워진다.

 

무엇보다 궁금한 것을 이제사 물어보자. 왜 둘이 아니고 셋인가?

농부는 두 명이고, 장군과 공주는 각 한 명, 중간에 구출해낸 여인까지 5명이다.

혹은 나중에 반역하여 이들을 따른 적 장수까지 계산한다면 6명이 될 수도 있다.

 

애시당초 구로사와 아키라가 염두에 둔 세 악인은 누구인지 직선으로 질문한다면

그 질문은 "악인"이라는 단어 안에서 방점을 찍혀져야한다.

확실히 그들을 쫓는 적들의 무리에서 3이라는 숫자를 떠올릴 여지는 거의 없다.

 

영화 초반 농부 두 명과 그들과 비슷한 복색을 한 장군까지 묶어서 쉽사리 3인으로 낙인찍는 것은

편리하긴 하지만, 위험하고 나태한 숫자 계산법이 된다.

결코 이들이 극 내부에서 악인이 아니라는 것을 관객들은 초반부터 능히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악인이라 명명되어서 제목 아래서 조종당하여야할까?

영화에서는 어떠한 돌출된 해답도 던져주지 않고 황금 운송이 성공하여 후일을 기약할 수 있음을 제시한다.

 

나는 위에서 영화의 주인공이 장군이나 공주가 아닌 농부라고 말했다.

그 근거로 도입과 종결에서 두 사람의 농부가 벌이는 다툼과 친화의 모순된 관계가 자주 드러난다.

남은 한 명의 악인은 여전히 부재한다면 해답은 황금 운반에서 농부들과 같은 욕망을 추스릴 극 외부의 누군가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수많은 걸작들이 쉽게도 감정이입을 통해 참여시키려 했던 관객이란 이름의 주인공이다.

 

영화 내에서 두 농부의 입장에서 여린 공주는 그저 강간의 대상물일 뿐이고

그녀와 장군이 복수의 새로운 정권을 일으키건말건 그건 그들에게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관객으로서의 나 역시도 감독이 유도하는 봉건의 덫이 황금을 욕망하는 것만큼이나 허황됨을 쉬이 간파하여

감정이입의 대상으로서 두 농부의 솔직한 한탕 욕심에 몸을 담그고 싶다.

 

 

구로사와 아키라에게는 그 두 농부와 관객인 나를 묶어 세 악인으로 표시하고 싶은 마음에

농부들에게 힘든 노동을 내내 시키고도 겨우 황금 대신 보상금 얼마를 주고 보냈을테지만,

실제 악인은 농부를 엎드리게 하고, 윗전에 앉은 채 아래로 농부를 쳐다보는 공주와 두 장군의 세 사람일 것이다.

비록 그것이 물리적으로 숨겨진 요새가 아닌 흉중에 감춰진 본좌 의식의 권력인

봉건 의식과 계급 투쟁이라는 층위에서는 악인은 농부가 아니라 공주와 장군들일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마지막 장면에서 농부들이 서로에게 보상금을 웃으며 미루는 허무의 웃음이 미덥고

중간에 구출된 봉건 의식에 쩌든 여인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은 황금 운반기라는 흥행적 요소 안에 서민과 권력이라는 모순을

솔직하고 자극적으로 투쟁시키면서 어우러진 한판 축제와 반역으로 슬쩍 넘어가려는 대일본 봉건 찬가이다.

 

   

14. 요짐보 用心棒(1961) : 매춘과 도박과 폭력과 자본이 사라지면 평화는 오는가?

 

한 사내의 뒷머리와 윗등이 보인다.

사내는 왼손으로 자신의 귀 근처를 긁적이고, 카메라는 정면 얼굴이 아닌 몸통을 비춘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의 무릎 아래 발로 움직이며, 길가 작은 돌부처상을 비춘다.

먼지가 회오리치는 마을에 개 한 마리가 잘려진 인간의 손목을 물고 뛰어간다.

사람들은 나무창살 사이로 이 새로운 방랑자를 신기한 듯 혹은 경계하면서 쳐다본다.

주인공의 내적인 성격과 극의 경쾌한 코믹함, 잔혹한 갈등의 종점등이

도입부 안에 심어진  위 이미지들의 연쇄로만으로도 충분히 자세히 안내된다.

 

 

잘 알려진대로 이 작품은 할리우드 고전 서부극이라 할 "셰인"류의 방랑자 정의파 총잡이 양식을 차용해왔지만,

도입부 극 외부에서 안으로 삽입된 북소리와 후반부 현대 음악이 사무라이의 걸음과 

매력적으로 장단을 맞출 때 그 흥겨움에서 맛보는 관객의 쾌감은 서부극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주로 장쾌한 남성 저음 하모니와 기병대 나팔음, 주전자의 물끓는 소리, 말 달리는 따각거림에 관습적으로 의존했던

서부극에서 주인공 인물 성격을 음향효과로 제시하고 이를 극 전체로 퍼지게하는 내공은 찾기 어렵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사무라이는 점점 더 홀홀단신이 된다.

"7인의 사무라이"에서 7명 모두는 어느새 하나로 취급되어 외딴 섬과 같은 이미지였다면

조총 심지어는 권총에 의해서 조금씩 밀려나가는 사무라이라는 지위는 단독자로 축소된다.

하지만, 오히려 이와 같은 방향으로 밀고나가는 감독의 연출 안에 사무라이는 끝까지 시대의 의를 지키는 고독이다.

미후네 토시로는 전작 "숨은 요새의 세 악인"에서 바로 데려온 솜씨좋고 전술에 뛰어난 사무라이가 된다.

이 작품 이후 수많은 리메이크작(미이께 다카시의 존경에 찬 복원극 "스키야키 웨스턴 장고"를 비롯)을 거론하거나

카메라의 시선이 따라나선 힘 중심의 테크닉을 다시 되짚어보는 것은 지겹도록 반복된 이야기꺼리일 것이다.

 

  마을을 점령하려는 두 대결 집단 사이에서 홀로 망루에 앉아 구경하는 장면에서 사무라이는 쉽게 구로사와 아키라가 된다.

문제는 두 집단은 도대체 누구이며, 감독의 전술은 정말 타당한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영화의 제작시기는 60년대이고, 이 10년은 일본 전공투 세대의 영욕이 같이 했던

일본 경제 발전의 획기적 시기였던 70년대 앞에 놓여진 격동의 시기였다.

60년 안보 투쟁을 이근 전학련의 등장과 신구 좌익의 대립 논쟁은 동 시대의 가장 또렷한 사건이었다.

이 작품보다 1년 앞서 오시마 나기사는 "일본의 밤과 안개(1960)"를 통해 연극과 영화의 형식을 깨부수는 방식으로

구 공산당파와 자신이 신뢰하는 신좌익 간의 투쟁을 격렬하게 무대에 올리고 결국 상영 취소를 당하고 쫓겨났다.

 

 

같은 시기 구로사와 아키라는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에서

거대 기업의 부정을 고발하다가 추락하는 젊은 사내를 통해 자본주의의 타락을 염려하고

다시금 "요짐보"를 올려 전작에서의 자본주의에 대한 염증을 반복한다.

갈등하는 두 집단은 각기 착취적인 성매매업과 서민를 갉아먹는 도박업을 운영하고

그들의 뒤에는 큰 형님으로 비단장수와 양조업자가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이들을 받쳐주는 주무기는 폭력이며 관료는 결국 뇌물과 무능력으로 일관한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그가 젊은 시절 몸담았던 좌익 정신을 살포시 떠올려 연이어 사회고발성 작품들을 연출한다.

 

 

하지만, 문제는 어디까지나 방법이며 과정이다.

여기에는 부르조아 민주주의에 대한 불필요한 중간 지대의 무게감도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어떠한 단결된 집단으로서의 저항도 부재하다.

단지 사무라이가 전시하는 휴머니즘은 극 초반에서의 돌 부처만큼이나 단단하고 일면적이다.

유일한 중간지대인 사무라이의 휴식처인 식당 주인조차 거의 혼자일 뿐이다.

한 가족의 슬픈 사연이 제시되고 그들을 구출하여 곤란을 겪는 사무라이의 극 위기 부문조차도

단지 사무라이의 영웅적 투쟁을 위해서 그대로 바쳐지고 있는 느낌이다.

알다시피, 자본은 어디서나 독점을 향해 돌진하지만, 그것을 거스를 혁명의 기운은 영웅의 자리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로사와 아키라가 망루에서 두 집단을 쳐다보는 그 자리에 자신의 페르소나를 배치했을 때

관객은 좌파적 심성이 아닌 1인 말살극의 환타지를 꿈꾸는 무사 돌부처를 만나게된다.

만약 무리한 상상이지만 현실 속에서 두 좌익 세력간의 충돌을 바라보며 가지는 감독 자신의 감회라면

노년한 감독의 해결책은 그저 탁월한 영화적 문법안에서만 빛날 뿐이다.

 

"츠바키 산주로", "천국과 지옥","붉은 수염"으로 이어지는 중기의 나머지 세 작품에서 그는

자신을 리메이크한 세르지오 레오네가 매달렸던 미국 역사의 이면을 규명하는 작업이 아닌

불분명한 휴머니즘으로 훈계하는 노련한 남성의 이미지에 매달린다.

이것이 "요짐보"에서 사무라이 무사가 죽임을 당하지 않고 단지 구타당해 감금되는 이유이다.

 

 

사무라이가 서민의 요짐보-보디 가드-가 되어 마을을 평화로 이끌었다고 평가할

마지막 일방적인 도살 이후 진정으로 주목할 장면이 등장하는데,

비단 업자가 양조장 사장을 죽이고 자신은 미쳐간다는 마무리는 극 전반을 표상하는 마침표이다.

하지만, 아무도 조용히 처리되지 않고 장르물은 언제나 환타지의 법칙에 종속될 뿐이다.

 

 

"요짐보"에서 권총을 들고 등장하여 사무라이를 위협하는 신경질적인 인상의 사내 역을 맡은

나카다이 다츠야는 "7인의 사무라이"에서는 그저 길을 지나가는 사무라이 중 한 명인 단역이었지만,

이후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인간의 조건"시리즈 등에서 열연한 이후 60년대 중반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국민 배우라는 칭호를 들이며 활발히 야쿠자극과 사무라이극 등 장르물에서 주연을 도맡았다.

그는 극 내부에서 미후네 토시로를 위협하듯, 극 외부에서도 구로사와 아키라의 후기작 두 편에서 주연을 맡는다.

 

 

"요짐보"는 탁월한 전술력과 화려한 검술로 치장된 사무라이 장르물의 정점을 세워놓지만,

자신의 훈계적 지위가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찾지못하는 감독의 한바탕 학살극이다.

 

 

15. 츠바키 산주로 椿三十郞(1962) : 60년대 신좌익이 그리 어리석지만은 않았을텐데.

 

그래, 앞으로 확실히 나갈 줄도 알아야한다.

"요짐보"의 속편이라할 "츠바키 산주로"는 오프닝과 라스트의 탁탁 거리는 효과음만으로도 동류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이미 흥행한 본편과 속편을 제작한 적이 있지만,

"스가타 산시로"라는 이름을 단 두번째 작품은 신출나기 감독이 제작사의 요구에 응한 미숙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제 구로사와 아키라는 장인의 경지를 넘어섰고, 누구나 휘둥그래질 "요짐보"의

누더기 옷과 항상 배고프거나 잠자고 싶은 고수 사무라이 미후네 토시로를 이대로 보낼 순 없다.

 

 

지난 "요짐보"가 변두리 마을의 이야기라면 이제는 정통 사무라이극 내부로 들어서서 긴장감을 높인다.

게다가 1년 사이에 부쩍 성숙해진 나카다이 다츠야는 확실히 미후네 토시로를 위협하는 고수 검객으로 자라주었다.

비록 전작에 비해 먼지와 동네 들개와 부처상, 망루의 이미지 조합들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데뷔작의 연꽃 이후로 구로사와 아키라가 주목했던 자연의 화려함으로 동백꽃을 가져다 놓았다.

어긋난 리듬의 효과음과 사무라이의 뜀박질, 그들 만의 흥얼거림에 묻어나는 코믹함은 전편보다 흥행에 무게를 실었다.

 

 

하지만, 정작 구로사와 아키라가 공을 들인 지점은 단연 초반 젊은 사무라이들만이 등장하는 넒은 방의 모의 장면이다.

전편 "요짐보"가 휘휘 둘러 60년대 전공투를 휴머니즘으로 지도편달하려 했다면

이제 자신감이 붙은 감독은 바로 직설적으로 운을 떼고 말한다. "바가야로(바보)"라고.  

 

젊은 사무라이 9명(이 숫자에 미후네 토시로를 더하면 10명이 된다는 것을 내내 강조한다. 완벽한 집단 10명)의

지역 내 정권 반란자에 대한 처단 모의 장면에서 오가는 대사들은 비록 간접적이지만,

60년대 당시 일본 내 엇나가는 구 공산당 주류에 대한 신좌익들의 비판의 칼날이지만,

구로사와 아키라는 다시금 미후네 토시로의 페르소나적 위치를 통해 이들을 여러차례 훈계하는 데 주력한다.

지극히 성급하고 지략이 없으며 실력조차 의심스러운 젊은 사무라이의 위치에 신좌익을 슬쩍 포개놓는다.

 

 

문제는 "요짐보"에서와 같이 미후네 토시로=감독의 정치적 위치인데,

그는 "요짐보"에서보다 휠씬 더 많은 도살을 보여주는 흥행 요소 속에서 번민하는 주인공을

동백나무와 자신의 실제 나이 40살을 30살로 줄인 영화의 제목 "츠바키 산주로"를 통해서 자연의 풍미까지도 섭렵했음을 

강조함으로서 전편의 휴머니즘적 자리에 안착하려는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자신을 구 좌익 중에서 여전히 살아 들끓는 현자 중 하나로 스스로를 지명하고 있는 듯 싶은데

이 두 위치 중 어느 편인지 극 내부의 서사 전개나 성격 부여만으로는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데뷔작인 "스가타 산시로"의 스승-제자라는 일방향적인 가르침을

오히려 좀 더 상업적이고 흥미 위주의 긴장감과 자극적인 검술 활극으로 올려서

그동안의 어느 영화보다 스승으로서의 자기 위치에 주목한 작품이니

두 영화의 제목에서 비슷한 숫자의 향기를 찾을 수 있음은 우연이 아니다.

 

 

젊은 사무라이들의 정의로운 모반은 성공하여 늙은 반역파들은 타도되고

그들이 단지 외견상의 차별로 인해 오해했던 장관은 다시 옹립되는데

구로사와 아키라는 말같이 긴 얼굴이라는 혐오스러운 외모를 주인공과 장관의 입을 통해 반복해서 들려주면서

중요한 것은 허가 아닌 실이라는 그의 관념을 다시금 되살린다.

하지만, 당시 일본 구 공산당 파가 단지 외모라는 이유만으로 비판받지는 않았음을 주지한다면

그가 구출하여 제자리로 돌아온 장관과 그의 부인의 정체성이 명확하지 않음은 아쉽다.

 

 

"요짐보"와 "츠바키 산주로"에서 무협영화사적으로 짚고 넘어가야할 지점은

위 사진에서도 보여지듯이 분수처럼 쏟아지는 피, 잘려나간 팔 등과 같은

무협 고어적인 장면 등을 과감하게 정통 극장판의 수면 위로 올렸다는 것이다.

이후 사무라이 활극은 물론 야쿠자 영화, 장철 등의 홍콩 무협물들은 구로사와 아키라에게 이를 빚지고 있다.    

 

 

"츠바키 산주로"는 바보같은 신좌익을 꾸짖는 전쟁 전 좌익 세력이 내리는 어색한 훈화이면서

사무라이 활극이 가져야할  경쾌함과  긴장감을 조금 풀린듯한 눈빛으로 제시한 약간 딸리는 속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