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제철주택단지 이야기

포스코 주택단지를 떠난지 30년이고
포항을 떠난지 20년 되었지만

그곳에 살고 있는 가족이 아직 있고 자주 방문 하기에
기억을 더듬어 풀어봅니다.

유치원부터 초중고가 다 있고 공고도 있고
나중에 포항공대까지 생긴 이곳은
아이들에게는 '온실'이었고
내조하는 엄마들에게는 '폐쇄적 커뮤니티'였습니다.

꽤 일찍 입사한 근로자들은
포스코 공장 맞은편에 인덕주택단지에 거주했습니다.
소음, 매연으로 아마 불편했을 겁니다.
공군비행장 공항?이 인근에 있었구요.

이후 70년대 후반?에 박태준회장이 형산강 건너 멀찌감치 '지곡'이라는 산동네에
주택단지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단층 주택을 지을 수 있는 부지들이 먼저 사원들에게 나누어졌고
(아마도...) 회사에서 금융지원을 해주는 형태로 집들이 지어졌습니다.

81년 즈음에 근로자셨던 아버지께서 지으신 집에 입주한 기억이
저의 포스코주택단지 생활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포항제철유치원에 다니게 됩니다.
작은 동물원이 있는 꽤 시설좋은 사립유치원입니다.
유치원 옆에는 음악당(현 효자아트홀)이 있었습니다.
자라면서 연극 오케스트라 영화 발레 전시 등 공연들을 볼 기회가 엄청 많았습니다.

음악당 아래쪽에는 노인정 '어버이집'이 있었고 그 앞에
대머리 의사선생님이 있는 진료소...
독신자 숙소, 독탕.가족탕이 있는 일본식 목욕탕.볼링장이 있었습니다.

음악당 쪽으로 숲속 도로를 걸어가면.. 헬리콥터 착륙장과
인공연못과 고급레스토랑이 있는 '영일대'가 나옵니다.
(지금은 북부해수욕장의 한옥전망대를 영일대라고 부르더군요.)

이렇게 각종 최신 인프라와 엄격한 건축제한 깨끗한 조경시설들로
포항 시민들에게는 '별천지'라고 불렸습니다.
외부인에게 집을 파는것도 엄격히 금지되어있었습니다.

외부인은 함부로 그 '별천지'에 구경하러 갈 수 없었죠.
단지는 철조망으로 둘러쌓여있었고 주택단지 입구를 올라오는 노선버스는
하이바를 쓴 헌병같이 생긴(군인아님) 경비원이 세워서 승차하고 검문을 받아야했습니다.
사실 조금만 뻔뻔하면 출입하는 데 별 제약이 없었지만
괜히 쫄아서 발길을 돌리곤 했다고들 합니다.

엄마들의 서열은 아빠들과 동일해야했고
회장님 순시 일정이 잡히면 단지내 도로청소에 동원되었습니다.

공장 근로자들은 언덕아래 속칭 '깡촌'인 효자동에 있는 효자역에서 통근기차를 타고
포항제철까지 출퇴근을 했습니다. 자가용 출퇴근은 거의 없었습니다.
눈치보여서 함부로 차를 살 수도 없었죠.

종교시설과 전문병원은 없어서 포항 '시내'로 다녀야했습니다.
단지 내에 최소한의 상가만 허용돼서 뭔가를 사려면 '시내'로 나가야 했습니다.

근로자들은 전국에서 모였지만 어쩐 일인지 아이들의 말투는 서울말씨로 통일되었고
이 아이들이 자라고 시내로 나가면서 꽤 오랫동안 '지곡 사람'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당시는 국민학교였죠. 인근 산촌 아이들이 각 반마다 한두명씩은 있었는데
외모와 사투리 가정형편 등으로 인한 차별이 있었습니다. 일부 동조하는 교사들도 있었구요.
치맛바람도 쎘고 동급생이라도 간부 자녀에게는 함부로 하면 안되는 분위기였습니다.
교육열이 엄청났기 때문에 직원자녀가 아님에도 인근 마을로 위장전입해서 전학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후 광양제철소가 생기면서 친구들의1/3이 사라졌습니다.

80년대 중반에 포항제철국민학교로 사립화 되고
포항공대가 지어졌습니다.

마이카 시대가 되면서 자가용 출퇴근들을 하기 시작하고
집도 작고 폐쇄?된 주택단지를 떠나 '시내'로 이사가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 이때 떠났습니다.

단지는 산 안쪽으로 계속 확장되면서 고층아파트 단지가 생겨났습니다.
낙후된 인덕주택단지의 사원들도 이곳으로 이주합니다.
덩달아 산촌 아이들은 부잣집 아이들이 되는..

중략

근황 요약

90년대 중반 구조조정으로 명예퇴직들 하고도 눌러 살면서 매매제한 같은건 진작에 없어졌고
포스코가 MB 한테 탈탈 털린 뒤로 건축제한도 풀려서 이질감이 느껴지는 '시내'스러운 건물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고
이제 70대인 아저씨들은 MB를 욕하면서도 박정희 신화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가짜뉴스와 카톡에 오염돼서 문재인 탓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일찌감치 퇴직금 날려먹고 시골로 고향으로 떠난 사람도 많아요.
요즘 부고가 부쩍 늘어나고 있습니다. ㅠㅠ
지진 이후 집값이 뚝 떨어져서 다들 우울해 하심